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바르 대제 (문단 편집) ===== 인도 동부, 서부 정복 ===== 북인도를 평정하고 말와, 라지푸타나 정복까지 끝마친 악바르가 눈길을 돌린 곳은 부유한 동부의 [[벵골]] 지방과 서부의 [[구자라트]] 지방이었다. 벵골 지방은 [[벵골 만]]을 통해 중국과 동남아로 향하는 교역로로서 어마어마한 부를 쌓아 인도 내부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알짜배기 지방이었고, 구자라트 지방은 [[아라비아 해]]를 따라서 [[유럽]]과 [[중동]]으로 향하는 해양 길목에 위치한 황금 같은 땅이었다. 악바르는 일단 구자라트를 먼저 합병하기로 결정한다. 벵골 지방에는 이미 무굴 제국의 힘이 어느 정도 미치고 있기도 했거니와 상황이 그다지 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바르는 일단 해안가를 접한 구자라트를 먹어서 북인도 지방에서 생산한 물화들을 해양 무역로를 통해 수출하고자 했다. 악바르는 구자라트인들이 자신을 추대했다는 명분을 내걸고 1572년 구자라트로 남하했다. 1572년에는 구자라트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였던 [[아마다바드]]를 정복했고, 1573년에는 구자라트의 반군을 모두 [[데칸 고원]] 너머로 내쫒아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자라트의 수많은 부유한 해안 도시들도 무굴 제국 아래 무릎을 꿇었다. 무굴 제국은 이로 인하여 구자라트의 엄청나게 부유한 해안가 항구도시들과 교역로를 바로 손 안에 놓게 되었고, 더이상 무굴 제국의 해양 교역을 가로막을 수 있는 세력은 북인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존에 구자라트를 통치하던 무자파 샤 3세는 자리에서 쫒겨나 [[옥수수]] 밭을 전전하다가 결국 무굴 군대에 사로잡혔다. 다만 악바르는 그에게 왕으로서 자비를 베풀어 작은 집 한 채를 내려주고 평생 조금씩 연금을 지급해주었다고. 구자라트마저 점령한 악바르는 파테푸르 시크리로 돌아와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는 거대한 [[개선문]]을 세웠다. 다만 악바르는 파테푸르 시크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구자라트로 돌아가야만 했다. 기존의 구자라트 반란군들이 아프간 귀족들의 사주를 받아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기 때문. 악바르는 6주가 걸릴 거리를 무려 11일 만에 돌파해 구자라트 아마다바드로 진입했고 1573년 9월에 대승을 거두었다. 악바르는 수많은 반란군 지도자들의 머리를 잘라버린 후 그들의 머리를 쌓아 탑을 만들어 반란군들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이렇게 한 번 더 구자라트를 밟아주고 나자 더이상 구자라트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후 구자라트는 매년 5백만 루피에 달하는 엄청난 세입을 더해주는 무굴 제국의 알짜배기 땅으로 변모했고 무굴 제국의 국력은 크게 증가했다. 이렇게 구자라트를 완벽히 평정한 악바르에게 걸리적거릴만한 세력은 벵골 지방의 아프간 잔재 세력들만 남아있었다. 저 옛날 셰르 샤 수르를 따르던 아프간계 귀족들 중 일부가 동쪽의 벵골로 이동해 힘을 키우며 무굴 제국에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슐라이만 칸은 무굴 제국을 자극하기를 꺼렸지만 슐라이만 칸이 죽고 그의 아들 다우드 칸이 왕위를 물려받으며 상황이 변한다. 1572년 왕위에 오른 다우드 칸은 아버지와는 달리 무굴 제국의 우위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등 완전히 악바르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상황이 심각함을 인지한 악바르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벵골을 진압하기 위해 또다시 원정을 떠났다. 이후 악바르는 1575년 투카로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벵골 지방이 완전히 무굴 제국 내에 편입되었다.[* 벵골의 [[오리사]] 지방만이 무굴의 봉신국인 [[카라니 왕조]]의 영토로 남았다. 한편 다우드 칸은 도망쳤다가 힘을 길러 다시 무굴에 도전했지만, 또 패배해 목이 잘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